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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설립의 아버지 : 장 모네 / 로베르 쉬망

작성자
주벨기에대사관
작성일
2020-05-18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이 세상을 덮치기 직전 마음대로 영화극장을 찾을 수 있었던 지난해 가을, 우리 어린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던 유명한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의 대표적인 노래는 주인공 엘사가 부른 "Into the Unknown(미지의 세계로)"이다. 유럽연합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of the European Union)이 누구인지 궁금해 찾아왔는데 뜬금없는 아동용 만화영화라니 당황스러울수도 있겠다.


사실 "into the Unknown"은 유럽연합 설립의 토대를 놓은 양대 거두 중 한 명인 로베르 쉬망(Robert Schuman)이 그 긴 여정의 공식적인 첫 발을 내딛던 순간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말로 알려져 있다. 쉬망은 자신이 천명하였던 ‘쉬망 플랜’에 따라 1951년 4월 18일 프랑스, 독일(당시 서독), 이태리,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6개국이 자신들의 석탄 및 철강 산업을 공동 관리한다는 조약 서명식에서“우리는 이제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We are venturing into the Unknown)”고 말했다.


유럽은 그 어느 대륙보다 많은 전쟁을 겪어 온 지역이다. 유럽인들이 항상 꿈꾸어 온 "Pax Romana(로마에 의한 평화)" 또한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서 달성되고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전쟁의 역사속에 독일 철학자 칸트는 '영구평화론'을, 나폴레옹 전쟁을 승리로 이끈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신성동맹'을 제안하는 등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유럽의 평화 협력에 대한 구상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서구의 몰락' 또는 '유럽의 자살골' 이라고 불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이후 장 모네(Jean Monnet)와 로베르 슈망 이라는 2명의 걸출한 프랑스인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1) 현대 유럽통합의 설계자 : 장 모네(Jean Monnet, 1888-1979)

장 모네

    장 모네
    출처 : 위키피디아


“우리는 단지 국가 연합체를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We are not forming coalitions of states, we are uniting men)"- Jean Monnet



(성장기)


유럽 공동체의 설계자 또는 아버지라 불리는 장 모네는 1888년 대서양 연안에 인접한 프랑스 중남부 코냑(cognac)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이름을 딴 유명한 브랜디인 코냑을 거래하는 무역업자였다. 모네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영국 등 유럽 각 지의 상인들과 거래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프랑스에서 대학을 다니는 대신 영국 런던에서 사업 수단과 영어를 배웠다.

아버지는 모네를 영국으로 보내면서“책이 아니라 창밖을 보며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힘쓰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모네는 집안사업을 위해 영국 뿐 아니라 북유럽, 러시아, 이집트, 미국 등 세계 각지를 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모네를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를 구한 영웅인 드골 장군(이후 대통령)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과 달리 세계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대표인사로 자리매김 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인 대학교육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회에 진출한 모네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말과 글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모네는 중요한 연설을 행하기 전 항상 자신의 원고를 부인과 운전기사에게 먼저 보여주고 그들이 충분히 이해하는 지를 확인하였다고 전해진다.



(1차 세계대전과 국제연맹)

1914년 소위‘모든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전쟁’으로 기대하였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건강상의 이유로 군 입대를 할 수 없었던 모네는 다른 방향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지인의 소개로 당시 프랑스 수상이었던 비비아니(Rene Bibiani)를 만난 그는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각자 별도로 관리하는 군수물자를 통합 관리하는 것이 승리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역설하였다. 그의 이러한 구상은 프랑스정부의 동의를 이끌어 냈으나, 영국측의 반대로 첫 2년간은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결국 전쟁 중반 이후 밀(wheat) 관리와 해상운송 분야에서 연합국 공동위원회를 구성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특히 1917년 말 설립된 연합국 해상운송 위원회(the Allied Maritime Transport Council)는 뒤늦게 참전한 미국의 수많은 군인과 막대한 물자를 유럽으로 안전하게 실어 날라 연합군의 승리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1차 세계 대전 직후 개최된 파리 강화회의에서 모네는 프랑스 산업통상장관을 보좌하여‘유럽국가들간의 협력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 질서 창출(안)’을 제시하였지만, 다른 연합국들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1차
대전 당시의 기여를 평가받아 약관 31세의 나이에 1919년 신설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사무차장으로 임명되어 전후 유럽과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모네는 만장일치제와 강제집행
수단의 부재 등으로 국제연맹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데 실망하고 때마침 어려워진 집안사업 등의 사정도 있어 1923년 사무차장 직을 사퇴하고 다시 비즈니스계로 돌아갔다.

이후 모네는 집안사업 뿐 아니라 국제금융가로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모네는 1925년부터 2차 대전 발발 직전까지 전 세계를 오가며 오늘날 미국 최대은행인 Bank of America가 인수합병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신생 폴란드와 루마니아의 통화가치 안정에도 큰 역할을 하는 등 국제금융가로서의 명성도 떨쳤다. 1930년대 중반에는 중국 장개석 정부의 초청으로 수년간 중국에 머물면서 금융기관 설립 및 철도망 재조정 등 중국의 사회경제 발전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시기 모네는 스웨덴 최대의 기업집단(에릭손, 사브 등)을 소유한 Wallenberg 가문, 독일의 Bosch 가문(기계제작, 가정용 물품 산업), 벨기에의 Solvay 가문(화학 산업) 및 미국의 Rockefeller(석유재벌) 가문과 John Foster
Dulles 국무장관 등과 친분을 맺으며 당대 최고의 마당발(the most connected man)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 패전의 결과 독일에게 지워진 베르사유체제(독일의 연합국에 대한 전쟁배상, 영토할양 및 군비제한)라는 가혹한 멍에가 독일 국민들에게 큰 모멸감을 안겨준 가운데 1929년부터 시작된 세계경제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은 독일 내 히틀러와 나치당이 독버섯처럼 자랄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하였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유럽과 전 세계가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의 나락으로 떨어지자 모네는 다시 한 번 영국과 프랑스가 연합군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해 12월 영-불 군수산업 조율을 위해 런던으로 간다. 1940년 6월 영-불 연합군은 전차와 비행기를 앞세운 독일군의 전격전(Blitzkrieg)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수도 파리를 점령당한 프랑스에서는 독일에 유화적인 비시(Vichy, 정부가 위치한 프랑스내 지명)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모네는 영국 정부에 의해 영국전시물자조달위원회 일원으로 워싱턴 D.C에 파견되어 미국이 민주진영의 거대한 무기제조창(America’s victory program for wartime production)으로 변모하고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 간 전략적 소통이 증진되는 데 큰 기여를 한다.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는 당시 모네의 활동 덕분에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1년이나 단축시킬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모네의 워싱턴 사무실이 위치해 있던 백악관 옆 Willard
Inter-Continental호텔 입구에는 지금도 그를 기리는 동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유럽통합의 초기 구상을 바로 그 곳에서 했다고 알려주고 있다.

1943년 모네는 '국가해방위원회'의 일원으로 알제리에 위치한 프랑스 드골 망명정부에 참여하는데 그해 8월 5일 동 위원회에서 유럽통합에 관한 그의 구상을 처음으로 밝히게 된다.

“2차대전 종전 이후) 국가주권의 원칙에 따라 질서가 재구성된다면 유럽에 평화는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유럽은 개별국가들이 자국민에게 필요한 풍요와 사회적 발전을 제공하기에는 너무나도 작기 때문에 국가들의 연합(federation)을 구성해야 합니다,"

모든 프랑스인들이 독일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던 그 힘든 시절, 모네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설파한다.

"독일은 패할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인들에게 굴욕감(humiliation)까지는 안겨주지 맙시다. 유럽에 살고 있는 모든 국민들을 통합시키고 독일까지 받아들이도록 노력합시다."



(종전과 모네 플랜)


1945년 마침내 독일은 패하고, 강한 민족주의 성향의 드골이 프랑스 내각 수반이 되었다. 드골은 피폐한 프랑스 경제를 재건하고 독일이 프랑스를 직접 위협하는 일이 더 이상 없도록 확고한 안전장치를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모네는 프랑스가 점령 통치하는 독일 최대의 광공업지대인 루르(Ruhr)와 자르(Saar) 등 라인강 서안지역을 정치‧경제적으로 독일로부터 분리하여 프랑스 경제권에 편입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모네 플랜(The Monnet
Plan)’을 입안한다. 즉 점령지인 독일의 자원을 활용하여 프랑스 경제를 재건할 뿐 아니라 독일의 국력을 항구적으로 약화(자르 지역 광산 몰수 및 루르지역 중공업 시설 해체 등)시켜 자국의 안보 우려를 해소하려 한 것이다. 때마침 이루어진 미국의 대규모 서유럽 재건 지원사업인 마샬플랜과 더불어 독일 자르 지역의 석탄과 프랑스 로렌 지역 철광석을 결합한 철강 생산 등에 힘입어 프랑스는 5년내 종전 수준을 뛰어넘는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격화되기 시작하면서 모네 플랜은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게 된다. 동구 공산진영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서독)을 재건시키려는 미국이나 영국에게 모네 플랜은 비록 프랑스에 대한 전쟁배상의 성격이 강하다 하더라도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1948년 무렵 모네는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미국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서독일의 재건은 허용하되 프랑스의 안보우려 해소와 경제적 이익을 지속 확보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당시 프랑스 국민들의 독일에 대한 적개심을 생각한다면 모네 플랜을 그냥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1948년 6월부터 시작된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로 인해 그 이듬해인 1949년 미국과 영국은 서독지역에 대한 자신들의 점령통치를 종식하고 독일 연방공화국(서독) 수립을 허용하는 한편, 루르와 자르 지방에 대한 프랑스의
권한도 신생 독일 연방정부로 이양토록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동-서 진영 간 냉전이 한국전쟁이라는 열전으로 변하기 직전인 1950년 초 모네는 당시 외교장관이었던 쉬망에게 독일(특히 루르와 자르 지역) 통치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입장을 최종 결정해야 할 때가 왔으며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다면 이를 해결할 좋은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유럽통합의 시작을 알리는 구상의 탄생)

모네는 최단 시일 내(일설에는 단 이틀만에)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당시 가장 중요한 전략물자인 석탄과 철강을 초국가적 기구 설립을 통해 독일과 프랑스가 공동으로 관리한다는 계획을 쉬망에게 보고한다. 1950년 봄 마침내
유럽연합 탄생의 서막을 알리는 쉬망 플랜의 기초가 완성된 것이다.

※ 쉬망플랜의 핵심인 초국가사무국 설립은 쉬망의 법률 보좌관이었던 Paul Reuter가 생각해낸 것이며, 후술할 쉬망 선언의 초안 또한 대부분 Reuter가 작성하고 모네는 이를 검토해 준 수준이었다고 의견도 있다.

독-불 간 전략물자 공동 관리 개념은 양차 세계대전 내내 연합국 주요물자 및 군수산업의 공동 관리를 주장하고 계획해 온 모네에게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상이 동맹국이 아니라 불과 수 년 전까지
총부리를 겨누었던 적국이라는 점은 대담한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루르와 자르의 석탄과 철강을 프랑스가 계속 통제할 수 없다면 차라리 공동 관리를 통한 평화협력 추구라는 대의명분을 살리는 한편,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가 주도하는 초국가기구를 통해 독일의 재부상 견제 및 프랑스 경제발전 기여라는 모네 플랜의 당초 목표도 그대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전술의 변화를 통해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자신들의 전략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냈으며, 아울러 유럽통합의 대장정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 것이다.

그러나 쉬망 플랜의 앞길에는 프랑스 국내 민족주의 진영의 반대 그리고 또 다른 당사국인 독일의 반대 등 먼저 해결해야 할 정치적 난제들이 쌓여 있었다. 이제 강력한 정치적 추진력을 가진 프랑스 외교장관 쉬망이 나설 차례가 된 것이다.



(2) 현대 유럽통합의 선도자 : 로베르 쉬망(Robert Schuman, 1886-1963)

로베르 쉬망

   로베르 쉬망
   출처 : EU 집행위

"유럽은 하루아침에 건설되거나 단 하나의 계획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유럽은 실질적인 상호 의존과 이익, 그리고 함께 행동하겠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구체적인 성과를 통해 만들어 질 것입니다.(Europe won’t be made at once, nor according to a single master plan of construction. It will be built by concrete achievements, which create a de facto dependence, mutual interests and the desire for common action)"- 1950.5.9. 쉬망선언

장 모네가 위대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사상가(thinker)라고 한다면, 로베르 쉬망은 이러한 구상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방법을 잘 아는 행동가(activist)라고 흔히들 평가한다. 쉬망이 모네의 구상을 쉽게 받아들이고 강한 추진력으로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장 배경과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고단한 역사의 질곡)

쉬망의 아버지는 알퐁스 도데의 유명한 단편소설‘마지막 수업’으로 유명한 알사스-로렌(Alsace-Lorraine) 지방에서 태어났다. 이 두 지방은 프랑스와 독일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양국 영토분쟁의 대상이 되어왔던 곳이다. 쉬망의 아버지는 원래 프랑스 시민권자로 태어났으나, 1871년 보불전쟁(프로이센과 프랑스간 전쟁으로 승리를 거둔 프로이센은 마침내 독일을 통일하고 독일제국 수립을 선포) 결과로 알사스-로렌이 독일측에 넘어가자 독일 시민권자가 된다. 쉬망의 어머니는 룩셈부르크 사람이었고 쉬망 또한 1886년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국적에 따라 가족 모두가 독일인이 되었다. 쉬망은 룩셈부르크에서 중등 교육을 그리고 독일 대학에서 법학 교육을 받은 뒤 로렌 지방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한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쉬망은 독일군으로 소집령을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일선 전투부대가 아닌 로렌 지역의 한 지역관청의 행정관으로 근무하였다.

※ 쉬망의 주변 인물들은 쉬망이 결코 독일군복을 입은 적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1차 대전의 결과 알사스와 로렌이 다시 프랑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자 법전문가였던 쉬망은 이 지역에 적용되던 독일 법체계를 프랑스 법체계로 전환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하며 프랑스 국회로 진출하게 된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 직전 쉬망은 독일에 대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프랑스 부총리에게 자문역할을 하는 국무부장관 직책으로 레이노(Paul Reynaud) 전시내각에 참여한다. 그러나 영불 연합군은 불과 6주만에 독일군에게 패퇴하고 수도인 파리까지 점령당해 레이노 전시내각은 무너지고 전 프랑스 육군원수 페탱(Philippe Petain)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괴뢰정부(regime of Vichy) 가 수립되자 공직을 사임하고 로렌지방으로 돌아가 독일에 대한 저항운동을 조직하게 된다.

프랑스가 해방된 이후 쉬망은 레이노 내각의 모든 권한을 페탱 前원수에게 이양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는 일각의 주장 등으로 당분간 공직으로 복귀하지 못하다가 결국 부역자라는 혐의를 벗고 1946년 재무장관, 1947년 총리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외교장관이 된다.


​(유럽 평화협력 증진을 위한 노력)


프랑스 외교장관으로서 쉬망은 1949년 4월 미국과 서유럽의 안보를 위한 ‘북대서양 조약(NATO)’그리고 5월에는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설립 헌장에 서명한다.

"우리는 천년 동안 꿈꾸어 왔던, 전쟁을 완전히 끝내고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는 조직을 만드는 위대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초국가적인 연합(supranational association)을 통해 국가들 사이의 화해를 이루어 내야만 합니다." - 1949.5.16. 유럽평의회 연설

한 때 독일 시민이었던 쉬망은 새로이 수립된 서독 정부의 아데나워(Konrad Adenauer) 총리와 비밀리에 상대국  도 방문 등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심지어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독일어로 이루어져 프랑스측 배석자들은 대화가 끝난 뒤 쉬망으로부터 대화의 내용에 대해 설명을 들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1950년 4월 쉬망플랜에 관해 보고받은 그는 비록 강한 민족주의 성향의 국민영웅 드골이 일시적으로 정계를 은퇴한 상황(1946년 말-1958년)이었지만 쉬망플랜은 프랑스 국민감정과 민족주의 진영의 강한 반대에 부딪힐 것이 라는 점을 직감하고, 프랑스 총리가 아닌 아데나워 독일총리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지지를 호소하는 우회 전략을 선택한다.

이튿날 오전 개최된 프랑스 내각회의에서는 아니나 다를까 쉬망플랜에 대해 반대의견이 우세하여 이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결정된다. 여타 각료들이 식사를 위해 자리를 떠나는 사이 쉬망은 프랑스 총리에게 다시 한 번 재고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바로 그 순간 아데나워 서독 총리가 프랑스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왔고 양 총리간 통화를 통해 독일의 先지지 의사를 확인한 후 프랑스 정부도 동 계획을 승인하게 된 것이다.

※ 아데나워 총리 측근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아데나워 총리는 쉬망 플랜의 경제적 함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루르와 자르에 대한 독일 주권 회복 및 △전범국 독일이 유럽과 국제무대로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정치적 판단에서 동 계획에 대한 지지를 결정했다고 하며, 공론화된 이후 루르와 자르의 자원과 산업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양도한 것이라며 독일 국내적으로 많은 비난에 시달린다.

(쉬망 선언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의 탄생)

1950년 5월 9일 쉬망은 기자회견을 열고 드디어 유럽연합 탄생의 길을 활짝여는 계획을 담은 '쉬망 선언(Schuman Declaration)' 을 발표한다.


"유럽 국가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독일 간 해묵은 적대감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석탄과 철강 생산을 공동 최고행정기관(common High Authority) 하에 둘 것을 제안하며, 이 기구는 다른 유럽 국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열려 있을 것입니다. … 석탄과 철강 생산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은 오랫동안 전쟁물자 생산에 공을 들여왔던 이 지역의 운명을 바꿀 것입니다."

“이 제안은 세계평화 유지에 필수적인 유럽 통합(European Federation)으로 가는 힘찬 첫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서유럽 각국은 쉬망의 제안을 환영하며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라는 중요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첫 번째 조치로 평가했다. 이듬해 4월 18일 서유럽 6개국(프랑스, 서독, 이태리,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은 쉬망 플랜을 구체화시켜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조약을 체결하고 그 해 12월에 비준했다. 1952년 마침내 오늘날 유럽연합(European Union) 모태가 된 유럽석탄 철강공동체가 정식 출범하였고 초대 수장에 장 모네가 선출되었다.
※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출범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후 몰수된 자르 지역 탄광에 대한 프랑스의 채굴권은 1981년까지 지속된다.

하지만 쉬망의 생각은 석탄과 철강의 공동 관리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유럽 여러 나라의 다양한 자원과 공장을 초국가적 기능에 의한 공동 관리하에 두고 생산의 합리화와 근대화에 기초한 공동경제시장을 창설해 결국은 정치적 통합까지 이루는 유럽연합(European Federation)으로까지 발전시킨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1957년 3월 '로마조약'을 통해 ECSC 이외 원자력 협력을 담당하는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농업, 수산, 교통, 에너지, 경쟁 등 경제 전반적인 협력을 담당하는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가 설립되는데 특히 EEC는 상품과 서비스, 자본 그리고 인력의 자유로운 이동과 관세동맹 등 유럽단일시장의 주요한 원칙을 관장하게 된다.

오늘날 쉬망은 유럽연합의 아버지로 칭송받으며,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유럽연합 본부(집행위, 상임위, 대외관계청 등)앞 광장은 그의 이름을 따 쉬망광장으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쉬망 선언이 발표된 5월 9일은 유럽연합의 날로 지정되어 매년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 장 모네와 로베르 쉬망 모두 드골로 상징되는 프랑스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유럽통합의 흐름을 만들어 냈다는 데 공통점이 있으나, 그들이 겪어온 인생 역정에 따른 것인지 모르겠지만 모네는 영미권에서 쉬망은 유럽권 내에서 각기 더 선호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흥미롭다.



유럽 본부

EU 집행위 본부
출처 : EU 집행위

장 모네, 로베르 쉬망 그리고 아데나워와 같은 유럽연합의 아버지들이 처음부터 확고한 신념과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개인과 조국의 이익을 희생하면서 까지 유럽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앞선 발자취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주어진 시대상황 속에서 자기 자신과 조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은 끝임 없는 협의를 통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책을 찾고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나갔다. 양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참상과 미-소 냉전이라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들은 공멸이 아닌 공존의 길을 택한 뒤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국민들간 화해를 위해 국내정치적 위험을 무릅쓰는 강인한 용기를 펼쳐 보인 것이다.

현재 브렉시트와 코로나-19로 인해 유럽연합의 미래에 대한 여러 가지 우려스러운 시선이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전쟁을 겪어온 대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인류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초국가적 기구를 향한 위대한 노력은 결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지난 70년간 유럽연합이 걸어 온 발걸음 하나하나가 전답미문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이었으며, 앞으로 가야 할 걸음 또한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한 것일 것이다. 그 길에서 EU는 언제나처럼“△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 차근차근 합의를 이루어 나간다”는 장 모네의 정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유럽연합 뿐 아니라 코로나-19 위기와 그 이후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할 전 세계인이 다가올 미래세대를 위해 져야 할 엄숙한 책무이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겨울왕국-2」에서는 엘사가 자신을 부르는 그 미지의 세계로 용감하게 들어가 진실을 알아내고 세상의 균형과 평화를 회복시키는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는다. 유럽연합과 우리 인류가 걸어가는 끝없는 여정의 고비 고비 마다에도 언제나 행복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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