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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확인한 계기는?

작성자
주이집트대사관
작성일
2017-11-02

 

   이집트의 피라미드 근처에 가면 MENA House라는 오래된 호텔이 있다.111 111이 호텔에서는 웅장한 피라미드의 전경이 한눈에 보일뿐만 아니라 Churchill Garden이라 명명된 작은 정원이 있는데, 여기에 하나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국이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 독립 국가가 될 것임을 예정한 ‘카이로 선언’ 기념비가 바로 그것이다.

 

   카이로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3년 11월 27일, 미국·영국·중국 3개 연합국의 지도자들이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 모여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하고 종전 시 일본이 탈취한 영토에 대한 기본방침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아니라 세계 역사에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다진다」 ...... 카이로 선언 中

 

 

   카이로 선언은 ‘현재 한국민이 일제치하에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다진다’고 한국에 관한 특별항목을 넣어,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하는 선언이었다.

  장제스

   일제 식민통치하에 신음하던 우리에게는 한줄기 빛과도 같았을 이 사건을 가능케 한 3명의 인물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었다. 대한민국이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핍박받던 시절, 우리 임시정부에 수시로 지원금을 보내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밀접한 관계였던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한국 독립의 뜻을 이끌어냈다.

 

 

소금상인의 장남

 

 

   1887년 청 제국 저장성에서 소금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엄격한 홀어머니 아래 자랐다. 8세때 ‘대학’과 ‘중용’을 읽을 정도로 이른 나이에 이미 중국 전통학문과 사상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쌓았다. 사람들은 이런 연유로 장제스가 훗날 민족주의적 성향을 띄고 전통적인 가치를 고수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고 변화를 꿈꾸다

 

 

   17세 때부터는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대해 들었으며, 혁명에 앞장서는 쑨원에 대한 존경심을 품었다. 당시 중국은 내부로는 군벌 간 치열한 세력다툼, 외부로는 외세의 침입 방어로 정신없는 상황이었는데, 일찌감치 혁명에 뜻을 품은 장제스는 1906년에 군관학교에 입학하고 이듬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중국내 새 공화국 수립의 열망을 품고 있던 그는 1911년 신해혁명 발발 당시 본국으로 돌아와 국민당에서 혁명군을 이끌며 군사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해 쑨원의 신임을 얻는다.

 

   장제스는 쑨원이 세운 ‘황푸군관학교’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많은 부하를 길렀으며 훗날 자신의 권력 강화에도 도움을 얻게 된다.

 

 

중국 통일,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1925년 쑨원이 사망하자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부하들의 지지와 군사력에 힘입어 국민당 권력을 쟁취한다. 군벌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거침없이 북벌을 단행하여 3년 만에 중국을 국민당 깃발 아래 통일했다.

 

   쑨원의 정통후계자임을 내세웠던 장제스는 1919년 쑨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한다는 방침을 밝힌 바에 따라 자신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호의적이었다. 그는 초기엔 별다른 지원을 보이지 않았으나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수시로 지원금을 보내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점이 바로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이라는 합의를 끌어낸 카이로 회담이었다.

 

 

장제스의 쇄락

 

 

   강력한 군사력으로 권력을 잡았던 장제스는 국민들에게 유교적 국가숭배사상을 재주입하였고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정책을 펼치는 한편, 정보기관을 통해 공산주의자와 반체제 인사 탄압 및 언론 통제를 일삼았다. 이밖에 공산당 섬멸전 때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많은 항의를 받았다. 게다가 승전 후 국민당의 내부 부패가 나날이 심해져 장제스가 통제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과의 전쟁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다가 1949년에는 대만으로 정부를 이전한다.

 

   장제스는 대만에서 국민당 정부를 재건하고 중국 본토의 공산당 소탕 작전을 세우며 재기를 계획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1975년 89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다.

 

 

대한민국 독립의 은인 장제스

 

 

   장제스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53년 11월 25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우리 독립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비록 독재자, 보수론자 등 역사의 비난 섞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뇌물을 수수한 며느리를 사형에 처할 만큼 부정부패 퇴치에 앞장선 강인한 지도자였던 장제스. 일제의 핍박에 신음하던 한국 민중의 처지에 관심을 갖고 그 목소리에 귀 기울였던 중국의 지도자. 비록 실질적 성과를 거두진 못했어도 우리나라 독립 운동가를 대상으로 거금을 지원하고 연합전선 구축을 권고하는 등 우리 독립을 앞당기는데 도움을 준 그의 행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실임에 분명하다.

 

   올해로 카이로 선언이 74주년을 맞는다. 메나 하우스 앞뜰에 굳게 자리 잡은 카이로 선언 기념비에 새겨진 문구가 사뭇 가슴 뭉클하다. 이제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되었지만 여전히 하나 되지 못한 한반도를 함께 떠올리게 된다. 훗날 이 비석 앞에 서는 세대들은 하나된 조국을 누리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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