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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일간 유럽에서 겪은 한국의 위상
작성자 진주철
작성일 2013-03-28
안녕하세요. 제가 지난 3일간에 겪은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체코 프라하에 살고 있는 저는 아침에 집을 나설때 열쇠를 집에 넣고 문을 닫는 실수를 했습니다. 보조열쇠는 조카에게하나 있었고 , 집주인에게 또 하나 있었는데 , 집주인에게 연락하면 분명히 귀찮아서 도와주지않을 변명만 늘어놓을것이 뻔해서 그냥 조카가 올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습니다. 제 조카는 이제 여기서 만 18세 생일을 보냈는데 , 여기온지 거의 6개월이 지나갑니다. 그리고 저는 식당업을 하는데 ,장애(3급)가 좀있는 조카를 한국에서 데려와서 일을 가르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희식당 주 메뉴가 활어회를 했었는데 , 구매가 어려워서 못하고 있던중 , 새 식당을 오픈하면 거기서 제대로 잘 해보려고 활어 구매처를 알아보고 있던중 바닷가 근처다른나라 크로아티아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마침 조카도 3개월여행비자가 두번째 만료되기에 그나라에 한번 다녀오면 다시 여행비자 3개월이 늘어나는 (소위말하는 점프) 를 하기에,이 두가지 이유가 조카를 크로아티아에 보내기에 합당했습니다. 그래서 직원한명(베트남)을 골라 같이 보내기로 하고 왕복버스 티켓을 끊어 간단한 여비와 함께 크로아티아에 보냈습니다. 돌아오는 날은 23일 토요일 21:00 에 크로아티아를 출발하여 , 다음날 아침 08:00 에 프라하에 도착하는 스케쥴이었는데토요일, 저는 우즈베키스탄 직원과 함께 일을 하고 그 직원집에서 잠시 잠을 청하다가, 아침에 마중나가서 데려오려고 했습니다.(집 열쇠가 없는 상황이어서 ). 누추한 곳에 반갑게 저를 맞이하는 우즈벡 직원의 집은 방이 2개인가 있었는데 , 직원의 방에는 침대가 6개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어쩔때는 이 방에서 6명이 살고 있었다는 애기 입니다 . 다른방까지 생각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한집에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잠시 잠을 청하는찰라, 밤 12시가 가까와져 있었는데 그 직원의 핸드펀에 벨이 울리고 다급하게 저를 찾는 전화가 왔습니다. 크로아티아에서 돌아오고 있던 조카와 직원이 국경에서 여권심사에 걸려 제지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심상치않는 기분을 느꼈고 , 그 직원과 통화를 해보니제 조카에게 비자 없는게 문제가 되어 ,결국 크로아티아로 되돌아 가야 할것 같다고 했습니다 . 베트남 직원은 장애가 있는 제 조카 옆에 같이 있어주려고 했고 , 그리고 전화 밧데리를 최대한 아껴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을 전달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자로 상황을 알려주는데 ,두사람은 도로 어딘가에 내려졌는데 , 허허벌판이고 ,앞에 도시도 없고 , 불빛도 없고 , 날씨는 춥고 , 눈인가 비인가는 내리고 있다고 ,,,,, 저는 왜 그 검문소에 그냥 경찰과 같이 있을것이지 , 왜 이동했는지 알수도 없었을 뿐더러 , 유럽 경찰이 사람을 허허벌판에 버리고 갔다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말이 정말이라면 , 크로아티아 국경의 위치를 알고 있는제게는 너무 무서운 일이었습니다.1차선길로 산을 굽이굽이 돌아 민가가 거의 없고 ,더구나 눈이 내리는 캄캄한 밤이라면 제 조카와 직원이 느낄 공포는 엄청났을 것입니다. 아무 생각을 해 낼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어려운일이 있으면 전화를 하는 체코주재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했습니다 . 늦은 밤인데도 잠에서 깨어 전화를 받으시며 , 크로아티아 대사관에 전화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부랴부랴 다시 식당으로 돌아와서 인터넷검색을 하여 크로아티아 대사관에 전화를 하는데 , 제가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연결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 혼자만으로 해결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되어, 조카의 어머니께 (누님) 전화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방법을 좀 생각해 보라고 ,,, 그리고 저는 계속 크로아티아 에 전화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던중 전화가 왔는데 , 한국이었고 , 외교부 콜센터의 여직원이 크로아티아 영사님과 통화가 되었으니 통화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지척지간의 유럽에서 유럽으로 전화연결을 못하고 있는데 , 한국에서 두 나라를 연결해 주고 있는것입니다. 크로아티아 영사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 저는 그 베트남 직원 전화기 크레딧을 충전해 주려고 ,그것을 아는 다른 베트남 직원집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공교룝게 가는 도중 제 전화기 밧데리는 바닥이 나고 , 직원의 집 근처에서 헤매고 있다가 , 어쩔수 없이 초인종이란 초인종을 다 눌러서 그 친구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직원은 베트남 여자인데 , 방하나에 가운데에 짐을 잔뜩쌓아서 경계를 지어놓고 , 둘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직원이 전달받은 상황을 말하는데 , 캄캄한 밤에 ,황량한 길 위에서 눈은 내리고 ,지나가는 차를 세워보려하는데 아무도 안세워주더라고, 그래서 마냥 걷고 있다고 ,,, 저는 방법이 없이 얼른 날이 새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던중 영사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다행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셨고 , 영사님께서 직접 차를 몰고 가고 계시다고 ,,,, 그시각이 새벽 2시 30분경... 정말 대단히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 영사님께서 그 시각에 그곳 먼곳까지차를몰고 직접가시다니..... 그리고 몇시간이 흐른후 , 자그레브 (크로아티아 수도 )에 안전하게 데려왔고 호텔에 숙박하게 해주셨다고 까지 하셨습니다. 그시각이 새벽 4시 30분 . 저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 날이새면 크로아티아로 가려고 준비를 하였습니다. 일요일 아침에 마침 계좌에도 돈이 없어, 카자흐스탄 친구에게 돈을 빌렸는데 , 그 친구가 하는말이 " 영사님 께서 그시각에 그런 수고를 하셨는데, 선물이라도 가져가야하지 않겠는가" , 하면서 헤네시 꼬냑 한병을 주었습니다. 부랴부랴 챙겨서 , 차에 연료를 가득넣고 다른 베트남직원과 같이 크로아티아로 쏜살같이 향했습니다. 크로아티아에 가까이 와서 입국심사하는곳에서 저는 맞은편검사대를 유심히 보면서 두사람이 겪었을 공포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제 여권을 호주머니에 제대로 찔러놓지 못하는 실수를 했고 , 크로아티아에서는 두사람이 머물고 있는 호텔이 네비게이션에 안나와 있어서 , 차에서 내려 길을묻다가 여권을 그만 길바닥에 떨어뜨리고 마는 실수를 또 한것입니다. 조카가 머물고 있는호텔에 부랴부랴 들어가 조카와 직원의 안전을 확인한 기쁨도 잠시였고 , 불행은 같이 붙어서 온다고 ... 이 순간에 여권까지 잃어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 정말 제 인생의 모든 불행의 시작을 예고하는듯한 이 느낌을 어떻게 이겨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어쩔수 없이 차를몰고 내렸던 곳을 한곳한곳 되짚어 가는데 , 경찰차가 한대 따라오더니 , 체코에서 온 한국인 이냐고 묻더니, 여권을 하나 주었다고 같이 경찰서로 가자고 했습니다. 경찰서에서 여권을 찾아와서 저녁을 먹고 따뜻한 잠을 청할수 있었습니다. 다음날 크로아티아 대사관에 가서 영사님께 인사를드리며 저는 제 조카와 두명의 베트남 직원을 차에태워 그 문제가 되었던 검문소로 다시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만 18세를 몇개월전에 넘긴 제 조카의 비자없는이유가 그렇게 입국거절의 큰 사유가되며, 거절만 할것이지 왜 길바닥에 버려놨는지 , 그리고 장애가 있는 사람을 그렇게 해도 되는지 , 정말 당신들 말데로이런 실수로 여기서 살지말라는 말이면 한국에 있는 집에 데려갈테니 보호자인 내가 데려가게 해달라 , 그러니 길을 좀 비켜달라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영사님께서는 차분히 상황을 설명해주시고,정석대로 하자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제가 흥분한 나머지 여기가 외국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던모양입니다 . 또다시 한국인의 무대뽀 근성과 해보자는 오기가 또 일을 그르치기에 충분했는데 , 영사님께서는 저를 기분나쁘지 않게 설득하시고 계셨습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대사관벽에는 대통령 사진이걸려 있었는데 , 박정희 대통령의 따님이 이제는 대통령이 되셔서 사진에 걸려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일에 와서 광부들을 격려할때 ,애국가를 부르다가 울었던 애기를 떠올렸고 , 배고프고 , 없고 못살았던 시기를 넘기게 해준 그분의따님이 이제는 대통령이 되어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사관 직원분들은 한결같이 무슨 죄지은 사람처럼 낮은자세로 자국민을비롯한 민원인들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사님이 안된다고 거절하면 그만인일을 왜 저를 바쁜시간에 설득하고 계시는지 , 제가 참 배부른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 저는 대한민국이 정말많이 변했구나 하는것을 깨달을수 있었습니다. 제 직원들이 사는 모습이(쪽방에서 6명씩) 마치 우리나라 70년대와도 같은 모습인데 , 우리는벌써 해외 곳곳에 대사관이 자리잡고 있고, 늦은밤, 잠도 못주무시는 수고를 하시고도 , 선물도 안받으시는 청렴결백한 외교관의 모습을 다른 나라 직원앞에서 의연하게 보여주고 계시는것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 더 섬세한 정성은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제 조카만 비행기를 태워서 보내기로 했는데 , 직항이 없어서 갈아타야만 합니다. 그런데 장애가 있는 조카가 그것을 해낼수있을까 염려되어 ,다른 한국인 세분하고 연결을 시켜주신것입니다. 항공권 시간을 같이 맞춰보려고 애를쓰셔서 결국 한국분 세분을 찾아서 같이 가도록 해주셨고 , 그렇게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또한번 큰일을 당했을 것입니다 . 왜냐면 , 비행기가 연착되어 비엔나에서 하루 자야만 했었으니까요 . 크로아티아에서 돌아오던날은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 도로가 얼어붙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살짝 브레이크를 밟았는데도 차가 트위스트처럼 춤을 추더니 정확히 머리를 오던방향으로 돌려놓는 것입니다. 다행이 뒤따라 오던차가 없어서 사고는 나지 않았지만 , 사고가 났었다면 스노우 타이어가 장착되지 않았던 제차의 수리 과정은 험난하겠지요. 그보다더 더 무서운것은 , 눈길에 조심해서 운저하라고 30분마다 전화해주시는 영사님께 미안한일을 또 만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공항에서 저는 조카와 한국분세명을 반갑게 만날수 있었습니다. 이번 3일간에 일을 주위의 국적이 다른 친구들이 보았고 , 칭찬과 놀라움을 표현합니다 . 특히 카자흐스탄 친구는 고려인으로 한국말을 전혀 몰라도 , 할머니또는 어머니를 통해 한국울 어렴풋이 알고 있으며 , 한국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일을통해 그 친구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각인시켜주셨습니다 . 저 역시도, 없고 못살았던 시기에 태어난 40대 남자로, 이익창출, 성공, 출세 , 이런것이 삶의 주요 주제였기에, 해외에 나와서 사업할때도 ,빨리빨리 해야만 하는것은 습관이 되어있었고 , 무대뽀식 밀어붙이기, 무계획적인 찔러보기식 행동 , 등으로 주위사람들을 많이 힘들게 했습니다 .직원들을 체용하고 해고할때도 , 제가 한국사람이니 한국이 겪어야될 좋지않은 이미지를 생각해보지도 못한점도 정말 미숙한 한국인이 모습이었습니다. 이번일을 통해 달라진 우리 나라 위상만큼이나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조심스럽게 살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교관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 어느직업보다 어려운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저같은 한국인을 상대해야 하느니 말입니다 . 그래도 인내를 가지고 전문지식으로 , 그리고 모범된 행동으로 다른사람에게 뭔가를 느끼게끔해주신 외교관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이 이제는 (있는 나라 ) 라는 것을 다른 나라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셨듯이 , 외교관분들은 ( 있는사람, 든 사람) 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셨습니다. 특히 , 크로아티아에 이병호 영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제 인생이 아마도 조금 성숙되기를 바라며 그렇게 된다면 크로아티아를 더욱더 생각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