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미 옆 카리브해에 위치한 도미니카공화국(이하 도미니카(공))은 아이티와 함께‘이스파뇰라(Hispañola)’섬을 공유하고 있다. 도미니카(공)은 우리나라에서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작은 섬나라이지만,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최초로 식민 활동을 시작한 매우 역사적인 곳이다.
도미니카(공)이 위치한 ‘이스파뇰라(Hispañola)’섬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속한 남유럽 이베리아반도의 로마시대 이름이다. 수도명‘Santo Domingo’는 가톨릭 교파 중 하나인 ‘Orden Dominicana’의 창시자인 Santo Domingo de Guzmán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으며, 국가명 ‘República Dominicana’는 위의 Dominicana와 공화국을 의미하는 República가 결합된 단어이다.
이스파뇰라섬의 동쪽 2/3를 차지하는 도미니카(공)의 면적은 48,432km²로 남한의 약 1/2, 한반도의 1/4에 해당하는 크기이며, 인구는 약 천만 명에 달한다.
도미니카(공)는 카리브해의 내리쬐는 햇살, 천혜의 해변과 뛰어난 골프코스 등 뛰어난 관광자원을 갖고 있다. 이외에 카리브해에서 가장 높은 산인 피코 두아르테, 가장 큰 호수인 엔리키죠 등 자연풍광과 함께 다양한 동식물 분포를 보이고 있다.
중미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시인 도미니카(공) 수도 산토도밍고에는 230만 명의 인구가 있으며 콜럼버스 시대의 많은 유적이 잘 간직돼 있다. 인종구성 비율은 물라토(백인과 흑인간 혼혈) 73%, 백인 16%, 흑인 11%로 집계된다.
도미니카(공) 헌법은 제정 이래 수차례 개정되어 왔으며, 근세에는 1966년, 1994년, 2002년에 개헌되었고, 지난 2010년 1월 26일 또 한 차례 개정헌법이 공표되었다.
도미니카(공)의 정부형태는 대통령중심제로서 대통령의 임기는 4년이다. 현 대통령은 2020년에 선출된 루이스 아비나데르(Luis Abinader)대통령이다. 또한 의회는 상원 32석, 하원 190석으로 구성된 양원제이다.
도미니카(공)는 카리브에서 쿠바, 자메이카 등 여타 국가들에 비해 가장 큰 규모의 경제를 갖고 있다. 원래는 농업분야가 사탕수수, 커피, 바나나 등을 수출하는 등 경제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나, 최근에는 관광, 통신 등 서비스업이 국가경제의 최대 분야를 차지하고 있다. 도미니카(공)의 주요 수출품은 페로니켈, 금, 설탕, 커피 등이며, 수입품은 석유, 공산품, 식품 등이다. 부존자원으로 페로니켈, 금, 구리, 보크사이트, 대리석이 풍부하다.
영국령 식민지였던 주변 카리브국들은 영어를,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이웃나라 아이티는 불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도미니카(공)는 여느 중남미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다
국민들의 종교는 가톨릭이 약 70%를 차지하고 있는데, 정치․경제․사회 이해그룹간 분쟁발생시 가톨릭교가 중재에 나서는 등 가톨릭은 종교를 넘어 사회생활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교가 기득권층과 결탁한 세력 또는 기득권 세력의 일부로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의 편이 되지 못한다는 비판이 있다.
도미니카(공)의 기후는 열대성 기후이며, 연평균 27˚C의 기온과 연평균 강우량 약 1,500~2,000mm를 보이고 있다. 도미니카(공)의 계절은 건기(11~4월)와 우기(5~10월)로 구분된다. 건기에는 약간의 강우현상이 있고 아침과 저녁 기온이 한국의 초가을 날씨보다 높은 편이며 낮에는 평균 30˚C 이상 기온이 상승하는 무더운 날씨다. 우기에는 폭우가 동반되고 때로는 가공할 위력의 허리케인이 몰아쳐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하며, 더위가 극심한 8~9월에는 열대야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도미니카(공)과 한국은 1962년 6월 6일 국교를 수립했다. 우리나라는 1980년 12월 도미니카(공)에 상주공관을, 도미니카(공)는 1983년 3월 한국에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양국은 국교수립 이래 긴밀한 우호협력관계를 유지 발전시켜 오고 있다. 도미니카(공)는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 우리 입장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우리의 우방국이다. 한국은 도미니카(공)에 주로 자동차, 섬유제품, 플라스틱제품, 고무제품, 가정용 전자제품 등을 수출하고 있으며, 페로니켈, 고철, 폐배터리, 코코넛 등을 수입하고 있다.
1492년 8월 3일 스페인의 팔로스 항구에서 출항에 나선 콜럼버스는 그 해 12월 5일 타이노(Taíno)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이스파뇰라섬에 상륙한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1496년 콜럼버스 동생 바르톨로메오는 신대륙 최초의 도시인 산토도밍고를 건설하는데, 스페인은 이 도시를 다른 중남미 지역 정복을 위한 거점으로 삼고 대농장을 건설함으로써 엄청난 경제적 부를 축적하게 된다.
스페인인들이 더 큰 경제적 부를 찾아 아즈텍과 마야 문명을 정복해 나가며 카리브 지역에 신경을 쓰지 못한 사이, 프랑스는 이스파뇰라섬 서부지역 포토프랭스에 터전을 마련하게 된다. 이후 스페인은 1697년 리스윅(Ryswick) 조약으로 섬의 서부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1795년에는 섬 전체를 당시 유럽의 최강국인 프랑스에 넘기게 된다.
이때 프랑스는 노예를 노동력으로 활용한 대농장을 성공적으로 경영했으며, 이에 따라 프랑스가 경영했던 서부지역은 스페인이 할양했던 동부지역에 비해 경제가 크게 발달하였고, 인구도 동부지역에 비해 약 4배인 50만 여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의 지배는 얼마가지 않았다. 프랑스가 유럽과의 전쟁을 치르며 식민지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이에 이스파뇰라섬 서부지역인 아이티에서 인구의 90%를 차지하던 흑인노예들이 해방혁명을 일으키며 프랑스 지배자들을 쫓아낸 것이다. 이로 인해 동부의 산토도밍고로 피신하게 된 프랑스인들은 얼마 후 본국으로부터 파견된 해군과 함께 반란노예들을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아이티의 부를 일구어낸 힘 좋은 노예들의 자유를 향한 불꽃을 꺼뜨릴 수는 없었다.
게다가 스페인 정복자들의 후예인 끄리오요(Criollo)들도 프랑스와 적대관계에 있던 영국과 아이티의 지원으로 프랑스로부터 1808년 독립을 선언했다. 이제 산토도밍고를 비롯한 동부 지역은 다시 스페인의 지배로 귀속됨으로써 이스파뇰라섬에 대한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종결되었다. 다만 스페인의 중남미 지배 역시 곳곳에서 종언을 고하고 있었다. 산토도밍고 총독을 지낸 호세 누네스 데 카세레스(José Núñez de Cáceres)도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고 당시 시몬 볼리바르가 꿈꾸던 중남미 통일국가인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 공화국’으로 편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불과 9주 만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바로 흑인노예들이 건설한 이웃나라인 아이티가 이 신생국을 정복해 1822년부터 1844년까지 총 22년간 무자비한 통치를 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아이티 사람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절정기를 이루었던 이때를 매우 자랑스러워하거나 그리워한다.
당시 아이티 지도자 장 피에르 보이어(Jean-Pierre Boyer)의 독재와 폭정 아래 시달리던 도미니카인들은 독립을 향한 열망을 차츰 더 강하게 품게 된다. 다만 독립운동 진영은 친프랑스파, 친영국파, 친스페인파, 독립파, 친미파 등으로 분열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중 비밀 독립운동결사인 라 트리니타리아(La Trinitaria)를 설립한 후안 파블로 두아르테(Juan Pablo Duarte)는 라몬 마티아스 메야(Ramón Matías Mella) 및 프란시스코 델 로사리오 산체스(Francisco del Rosario Sánchez)와 함께 외세의 개입 없는 도미니카(공)만의 독립을 선포한다.
당시 엘 세이보(El Seibo) 지역의 부유한 목장주로서 초대 군사령관이었던 페드로 산타나(Pedro Santana) 장군은 이들을 적극 지원한다. 마침내 후안 파블로 두아르테, 라몬 마티아스 메야, 프란시스코 델 로사리오 산체스는 1844년 2월 27일 아이티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이룩함으로써 도미니카(공) 건국의 세 아버지로 추앙받게 되었다.
1844년 독립 이후에도 아이티는 도미니카(공)을 재점령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불안한 독립상태가 지속되자 1861년 산타나 장군은 가까스로 독립한 도미니카(공)을 스페인의 식민지로 편입시키기로 자원하는 조약에 서명을 하게 된다. 이는 중남미 국가 중 유일한 사례이기도 하거니와, 많은 반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조치였다. 이에 1863년 그레고리오 루페론(Gregorio Luperón) 장군 등 반대파들은 수복전쟁을 선포했으며, 중남미에서 물러간 스페인 군사력의 재유입을 우려한 아이티 및 미국의 직간접적인 지원에 힘입어 1865년 스페인군을 완전히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1869년 도미니카(공) 대통령이었던 부에나벤투라 바에스(Buenaventura Báez)는 미국과의 합병을 시도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그랜트(Grant) 대통령도 해군기지 건설 및 해방노예 정착지로서 도미니카(공)의 가치를 인정하여 합병조약에 서명한다. 그러나 당시 도미니카(공)이 안고 있던 150만 미불의 빚을 탕감해 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던 이 조약에 대한 비준안은 당시 미상원에서 의결정족수 2/3 찬성에 미치지 못하는 28-28로 거부되고 만다.
1882-84년과 1886-99년간 도미니카(공) 대통령을 지낸 울리세스 에우레아우스(Ulises Heureaux)는 방만한 재정경영과 부패정치로 국가를 파산상태에 이르게 하였다. 씀씀이가 헤펐던 에우레아우스 대통령은 결국 암살당했지만, 그가 남긴 부채는 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에 따라 도미니카(공)에서는 프랑스 등 유럽의 채권국들의 군사개입에 대한 우려가 높아졌다. 1905년 미국은 도미니카(공)의 대외부채를 갚아주는 대신 국가 최대수입원인 관세에 대한 행정권을 갖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미니카(공) 국내정치는 암살과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고, 결국 일시적인 개입으로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1916년 해병대를 파견해 도미니카(공)를 점령하고 군사정권을 수립하여 1924년까지 통치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점령에 저항하는 도미니카(공) 세력이 게릴라전을 지속적으로 펼쳤고, 미국 내에서도 식민지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1924년 미군이 철수하게 된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실시된 총선을 통해 취임한 오라시오 바스케스(Horacio Vásquez)가 미국의 지원 하에 안정적인 통치를 하게 된다.
1930년 취임한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Rafael Leónidas Trujillo)는 1961년까지 장기 군사독재정치를 펼치게 된다. 트루히요의 장기 독재가 종식된 이후 1924년 이래 30년 만에 실시된 1962년 대통령선거에서 중도좌파의 후안 보쉬(Juan Bosch)가 대통령으로 당선됐으나, 곧이어 1963년 발생한 군부쿠데타로 인해 후안 보쉬 대통령은 실각하고 군부는 민간인 3두 체제정권을 수립한다.
1966년 집권한 기독사회개혁당의 호아킨 발라게르는 3차례 연임한다. 하지만 재임 기간 중 부패와 인플레의 증대로 1978년 5월의 대통령선거에서 처음으로 야당인 도미니카혁명당의 안토니오 구스만에게 패하였고, 8월에는 구스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이후 기독사회개혁당과 도미니카혁명당이 번갈아 정권을 장악하는 양당정치의 형태를 띠었으나, 1996년 5월 선거에서 도미니카해방당 소속 페르난데스가 승리함으로써 다당정치가 시작되었다. 페르난데스는 2000년 도미니카혁명당의 이폴리토 메히아에게 정권을 넘겼다가 2004년 대선 및 2008년 대선에서 승리, 3선을 달성해 2012년까지 집권하였다.
도미니카혁명당은 안토니오 구스만 페르난데스가 1939년 망명처에서 소자본가, 일부의 농민, 지식인을 모아 결성한 정당이며, 반제국주의, 반과두제(反寡頭制)의 입장을 취한다. 도미니카해방당은 1973년 말 후안 보쉬가 결성한 정당이며, 기독사회개혁당은 트루히요 사후의 체제유지를 목적으로 1964년 결성된 보수정당이다.
도미니카(공)는 외교적으로 긴밀한 대미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OAS(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미주기구) 및 CAFTA-DR(Dominican Republic – Central America Free Trade Agreement:중미-미국-도미니카(공) 자유무역협정)회원국, SICA(Central American Integration System:중미통합체제)의 회원국으로서 지역 정치·경제 통합 움직임에 적극 참여코자 노력하고 있다.
군사력은 총 8만 3천 2백 명으로 육군 48,200명, 공군 20,000명, 해군15,000명 이며, 경찰병력은 3만 2천명이 있고, 병역제도는 지원병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