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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특집> ③"흔적도 없는 러, 신한촌"

작성자
주블라디보스톡총영사관
작성일
2009-08-14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강창구 특파원 = 일제 당시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이 펼쳐졌던 역사의 현장,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광복절을 나흘 앞둔 11일 오후 선열들의 흔적을 찾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에서 중앙도로를 따라 5㎞가량 북쪽으로 진행하자 산등성이 이곳저곳에 고층 아파트가 무질서하게 들어선 야트막한 야산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은 최소 100년 이상 됐을 법한 굵고 곧게 뻗은 나무들로 숲을 이루고 있지만 언덕 위로 향하는 중앙도로와 단지 내 각 도로는 승용차가 마주 달리기에도 버거울 만큼 비좁았고 아파트는 대부분 오래되고 낡아 음침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처럼 퇴락한 이 마을이 바로 1911년 이후 한인들이 집단 거주하며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벌였던 신한촌이다.

   신한촌은 지난 1911년 러시아 당국이 콜레라를 핑계 삼아 당시 블라디보스토크항 인근 해안가에 들어선 한인들의 최초 정착지 개척리 마을을 강제 폐쇄하는 바람에 이 마을에서 북쪽으로 3∼4㎞가량 떨어진 시 외곽 야산에 조성된 한인 집단거주지이다.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 선생을 비롯해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부재(溥齋) 이상설(李相卨), 최재형(崔才亨), 이종호(李鍾浩), 장도빈(張道斌), 홍범도(洪範圖) 등 기라성 같은 애국지사들이 모여들었다.

   애국지사들은 특히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과 학교를 설립해 민족계몽운동을 펼쳤다.

   권업회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러시아 관헌들에 의해 1914년 강제 폐쇄되기 전까지 회원 수가 1만여명에 달했고 순 한글 판이던 권업신문은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연재하고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문' 원문을 싣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신한촌 한인들은 3.1운동 직후인 같은 달 17일 대규모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이듬해 4월 일본군의 보복으로 300여명이 집단 학살을 당했으며 1937년에는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구소련 스탈린의 정책으로 마을전체가 폐허가 되고 말았다.

   마을 중앙도로인 하바롭스카야 거리를 따라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가로수가 빽빽이 들어선 숲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는 탑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탑은 지난 1999년 해외한민족연구소가 후원금을 모아 세운 것으로 국내, 중국 만주, 러시아 연해주지역의 항일운동을 상징하는 높이 3.5m가량의 대리석 기둥 세 개와 그 옆에 탑의 의미를 설명하는 비문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기념탑이 자주 훼손되자 연구소 측에서 탑 주변을 철제펜스로 두르고 문을 자물쇠로 채워 사실상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상태이다.

   기념탑은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는 한 고려인단체 회장이 출입문 열쇠를 관리하고 있으나 정부 등으로부터 별도의 관리비를 받지 않기 때문인지 연락도 어려워 각종 공식행사 시에도 기념탑 출입마저 어려운 실정이다.

   이날도 철제펜스 안 기념탑 앞에는 며칠 전 누군가가 던져놓은 것으로 보이는 시든 꽃 한 다발이 덩그러니 놓여 있어 마치 조국의 무관심을 대변하는 듯했다.

   이곳을 찾은 고려인 3세이자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국립대학교 한국학대학 송지나(60.여) 교수는 "기념탑을 세워놓으면 무엇합니까? 이곳은 자물쇠로 잠겨 들어가지도 못하고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나 최초의 한인이주마을인 지신허 기념비는 러시아 국경 안에 있어 역시 들어갈 수조차 없습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송 교수는 "한국 정부는 러시아 독립운동 유적지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라고 덧붙였다.

   현재 옛 신한촌에서 한인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단서는 거의 없다.

   과거 이동휘 선생이 거처하던 기념비 인근 하바롭스카야 거리 집터에는 `엘레나'라는 지상 1층짜리 상가건물이 들어섰고, 한인지도자들이 모여 독립운동을 논의했던 맞은편의 스탈린구락부 자리에도 다른 건물이 서 있다.

   또 주러 초대 한국공사 이범진 선생과 대한제국 내장원경을 역임한 이용익의 손자 이종호 선생의 기부금으로 설립된 한인학교와 장로교회, 3.1 만세운동을 기념해 소나무로 장식한 독립문도 사라진 지 오래다.

   다만, 산아래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 시베리아횡단 열차가 지나는 기찻길 언저리에 `세울스카야 a2'번지라는 지상 1층짜리 낡은 건물만이 과거 이곳이 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단초이다.

   블라디보스토크 한국교육원 이우용 원장은 "일제 당시 강력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신한촌의 흔적은 세울스카야라는 단 하나 뿐인 건물 주소가 유일하다"며 "개척리에서 강제 이주된 신한촌 주민들은 1937년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하에 중앙아시아로 또다시 이주당하는 이중의 비운을 겪었다"고 애통해했다.

   한인들이 신한촌으로 강제 이주하기 전에 집단으로 정착해 살았던 개척리라는 마을 역시 한인들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당시 한인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도로 이름도 `까레이스카야'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빠그라니츠나야'로 바뀌었고 커다란 운동장과 새로운 건물, 시민 휴식을 위한 각종 유희시설이 들어서 있다.

   1908년 이 거리 344호에는 해조신문사가 있었고 해조신문을 이은 대동공보사가 600호와 469호 등지를 떠돌며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신문을 발간했으나 지금은 이를 알리는 표석조차 없다.

   반면 당시 독립투사를 잡아다 고문하고 살해하는 장소로 활용된 일본 총영사관 건물은 100년 가까운 세월에도 인근 아케안스카야 거리에 굳건히 버티고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수원대 박환 교수는 "구한말부터 1922년까지 개척리와 신한촌을 중심으로 한 동포들의 강력한 항일투쟁은 8.15해방의 밑거름이 됐고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이 됐다"며 "과거 이념 문제 등으로 상대적으로 미진한 러시아 지역에서의 항일운동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와 더불어 선양사업에 정부 차원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kcg33169@yna.co.kr
http://blog.yonhapnews.co.kr/kcg33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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