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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역사의 오마주, ‘산타크루즈 대학살’

작성자
주동티모르대사관
작성일
2016-03-04

 1945년 8월 15일, 우리 선조들이 피땀 흘려 이룬 광복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습니다. 한 세대에 달하는 긴 시간이지만 식민지배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라가 있습니다.

21세기 최초의 독립국, 동티모르. 우리가 한일 월드컵을 기다리며 떠들썩하던 2002년 5월, 동티모르 국민들은 긴 고통의 시간 끝에 비로소 조국의 독립을 맞이합니다. 사실 이것은 동티모르의 두 번째 독립이었습니다. 동티모르는 450여 년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다가 1975년 독립을 합니다. 그러나 바로 9일 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27번째 주로 강제합병하면서 동티모르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동티모르에서 행해진 인도네시아의 악행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당시 동티모르의 인구 80만 명 중 20만 명이 인도네시아에 의해 희생당했습니다. 수많은 국민이 독립시위 중에 인도네시아 군경에 의해 무차별하게 살상됐지만, 동티모르는 국제사회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마침내 동티모르의 참상이 세계에 알려진 것은 1991년에 일어난 한 사건을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동티모르는 마치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동티모르 합병 이후 언론인, 성직자, 인권단체 등 외부인의 유입을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그러던 중 동티모르에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집니다. 포르투갈 의원단이 동티모르를 방문하기로 한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세상에 동티모르의 실상을 알리고자 투쟁계획을 세우고 만전의 준비를 해나갑니다.
그러나 1991년 10월 26일 포르투갈 위원단의 방문취소 발표가 나고, 그 다음날 무고한 동티모르 청년이 인도네시아 군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는 수도인 딜리의 공동묘지 ‘산타크루즈’에 안장되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주민들은 독립을 위한 시위를 계획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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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티모르 독립운동의 상징이 된 산타크루즈공동묘지

  11월 12일, 장례식 2주 후 무덤에 꽃을 바치는 관습을 지키기 위해 수천 명의 주민들이 독립을 위한 구호를 외치며 산타크루즈 묘지에 모였습니다. 아무런 무장을 하지 않았던 시민들은 도착한 지 10여 분만에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인도네시아 군에게 무차별한 공격을 당하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273명이 사망하고 250명이 실종됐으며, 37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동티모르 독립역사의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기억되는 ‘산타크루즈 대학살’입니다.

‘산타크루즈 대학살’은 그 동안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가려져 있던 동티모르의 현실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포르투갈 의원단을 취재하기 위해 들어왔던 외국기자들이 사건현장을 비디오카메라로 녹화했고, 이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불법적인 침략과 탄압이 전 세계에 드러나게 됩니다. 이 사건 이후 유럽연합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등이 인도네시아를 비난하고 나서며 군대철수를 요구하는 등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는 듯 했으나 2002년 독립을 쟁취하기까지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인도네시아와 정치 및 경제적 이해관계에 있던 국가들의 외면은 인도네시아의 폭력에 힘을 실어주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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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의 역사를 기록으로써 접할 수밖에 우리와는 다르게 동티모르는 그와 함께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당시 독립을 이끌었던 세대는 이제 동티모르의 사회의 주체가 되어 사회 각 분야를 이끌고 있습니다. 동티모르 국민들이 그리는 자국의 미래가 어떠한 모습일지언정 그들이 보여준 애국심이 개발과 성장에 가려 소홀해지지 않기를, 그때에도 그들이 이뤄낸 위대한 역사의 기억이 여전히 살아있기를 바래봅니다.

KOICA 동티모르 사무소
고윤정 해외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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