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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과 대한민국

작성자
주뉴욕총영사관
작성일
2011-05-02
 

서재필과 대한민국

                                                    2011. 4. 25


  서재필 기념 교육관 건립  기금 모금 뉴욕후원의 밤 연설문

   (2011. 4. 27 뉴욕일보 기고문)

서재필은 누구인가

서재필은 한마디로 “ 이러한 사람이다 ” 라고 단정하기 어려울 만큼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신 분입니다. 서재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880년대부터의 조선왕조, 열국의 각축, 일제의 침략, 대한제국의 멸망, 독립운동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과 1950년 6.25의 발발까지 거의 한세기에 가까운 우리 현대사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의 전 생애는 우리 민족이 역사상 가장 고단하고 험난했던 과정을 거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겨우 탄생을 하게 되는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게 됩니다.

서재필은 미국 한인 동포 사회 입장에서 보면, 최초의 한인출신 미 시민권자요, 최초의 한인출신(아마도 최초의 황색인종 출신) 의사이며, 최초로 미 주류 사회 명문가인 Amstrong가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성공한” 이민자 였습니다.  또한 품팔이, 막노동을 하면서도, 결국에는 펜실베니아 Harry Hillman Academy와 워싱턴의 Columbian Cochran University를 졸업하고 미국 사회의 지식층에 편입한 “American Dream"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서재필을 풍운이 몰아치는 한국 근대사의 입장에서 보면, 18세인 1882년에 과거(중광시)에 장원급제한 인재요, 구식 제도의 문관에서 출범하여, 곧바로 개화파의 일원이 되고 신식 군대 조직에 앞장섰고, 조선의 청년 개혁파(reformist)이며  20세 약관의 나이에 갑신정변에 앞장섰던 순수 열혈의 행동파 청년장교, 과격 혁명가의 모습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갑오경장(1894년) 후에 사면을 받아 고국에 돌아와 독립신문을 발간하면서, 계속 개화와 독립의 열정을 꺾지 않았으며 외교부 차관자리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며 내각의 중추원 고문으로 대한제국의 정치 및 사회개혁에 적극 조언하였습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결성하여 애국 민중들에게 독립과 자유민주주의 공화정 사상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습니다.

또한,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이상재, 이승만, 안창호 등 애국청년들에게 세계사정과 민주주의를 가르쳤으며 이들은 자유주의 공화체제에 심취하기 시작하였으며, 후일 이승만, 김규식 등이 미국유학을 떠나도록 권고하였고 미국에서 이들을 원조하였습니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파리 만국회의에 가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려 하였고, 필라델피아에서 “제 1차 한인 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 미국 내 독립운동을 개시하였습니다. 또한 영향력 있는 미국인 목사를 중심으로 “한국 친우회 (The League of friends of Korea)"를 조직하고 Korea Review라는 잡지도 발간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 조직도 결성하여 활발하게 활동하셨습니다.

서재필은 1920년과 21년에도 3.1절 기념식을 개회하였고 1922년 조병옥이 뉴욕에 한인회를 결성하자 이승만과 함께 이를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 활동을 후원하는데 아낌없이 사재를 털어 넣은 결과 자신은 1924년 법적인 파산상태에 빠지고 가족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60이 넘은 나이에 의과대학에 다시 진학하여 의학을 다시 공부하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1945년 해방 후 미 군정장관인 하지 중장의 의정자문관으로 초청을 받고 계속 서양하다가, 정국이 혼미해진 1947년 미군정청 고문으로 임명되어 미소 공동지원회에도 참여하고, 내분으로 치닫는 해방정국의 중재자로 기대를 받았습니다.

서재필은 많은 지도자들로부터 건국대통령으로 추대를 받았으나 사양하고 국민교육 등 비 정치적인 활동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는 해방, 건국 정국이 당파간, 좌우익 싸움에 치열한 것을 보고 실망하여, 건국과 새 정부가 성립된 직후인 1948년 9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서재필은 1950년 6.25 동족상잔이 일어났다는 비통한 소식에 충격을 받고 쓰러져 1951년 1월 87세로 파란만장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오늘날 왜 우리는 서재필이 필요한가

이제 서재필이 그토록 염원하던 조선의 개화와 독립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이제 63세로 접어들고 있고, 세계 가장 짧은 시간에 최빈국에서 12대 경제대국으로 발전하였고 수백만 명이 희생된 전쟁의 아픔을 딛고, 가장 모범적인 민주국가를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아직도 남·북으로 갈라져있고, 선진통일국가를 이루는 여정은 아직도 험난합니다. 북한정권은 자기 주민들을 아직도 굶주리고, 추위에 질병에 떨게 하며, 폭압적으로 개인의 정신과 양식을 구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서재필 박사, 이승만, 김구, 안창호, 김규식 등 모든 선각자들이 원했던 현실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미국의 혁명전쟁과 독립시민운동을 이끌고, 현재의 미국을 건설한 지도자들을 “Founding Fathers" 라고 부르고, 이들을 기리며, 이들을 대해 후세에게 철저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미국의 국부 George washington, Thomas Jefferson, Lee hamilton등을 존경하고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건국의 역사를 치욕의 역사라고 하고, 미국의 앞잡이들이 세운 역사라고 주장하고, 후세들에게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치욕의 역사로 왜곡하여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미국과 같이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기릴 수 있는 대한민국의 국조, 국부(Founding fathers)들을 새삼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집안에는 아버지가 있듯이 나라에는 국부가 있습니다.

비록 독립운동과정과 건국과정에서 뜻이 충돌하여 당파가 갈라지거나 분쟁이 있었다 해도 우리의 선각자들은 독립과 건국에는 평생을 바쳐 뜻을 함께 했으며, 일제의 강점에 피해 받았던 나라를, 자유민주주의 공화체제로 건국하고 발전시킨다는 데에 모두 공감하였습니다.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서재필, 이승만, 김규식 등 미주지역 지도자들과의 연계와 참여도 중요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자연스럽게 대한민국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세대는 이들 국조, 국부들의 높은 뜻을 기려야 하며, 이분들의 다툼을 과장하거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음해, 왜곡하는 북한 정권등 대한민국의 반대세력을 결연히 배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서재필 박사는 미국최초의 시민권자, 고학생일 뿐 아니라, 조국을 위해 독립운동가로 평생을 헌신한 지식인, 선각자로서 기억될 것이며, 이승만 박사는 전주 이씨 왕족 출신이지만 공화제 민주주의 대한민국에 앞장선 분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린스턴대 철학박사를 받은 분입니다. 그리고 미 군정청 경무부장, 내각장관 등을 역임했던 조병옥 박사는 콜럼비아 대학출신의 최초의 뉴욕한인 회장으로도 기억될 것입니다.

이제 한인동포사회는 차세대 한인들이 어떻게 발전해 나아가야 할 것이며, 차세대는 본국에 대해 어떠한 유대감과 공동체의식을 가질 것인 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서재필, 이승만, 김규식, 조병옥, 김활란 같은 분들은 뉴욕을 비롯, 미 동북부 지역에서 고학으로 공부하며 이 주류사회에서도 존경을 받은 선각자, 독립/건국의 아버지들입니다. 이 분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일대기를 널리 알리는 것은 미국 동포사회의 차세대들과 본국의 차세대가 같이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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