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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화가산책: 국민의회와 부르봉 궁전(l’Assemblée Nationale et le Palais Bourbon)

작성자
주오이시디대표부
작성일
2016-02-19

 프랑스 문화가산책: 국민의회와 부르봉 궁전(l’Assemblée Nationale et le Palais Bourbon)

프랑스의 하원은 ‘국민의회’(l’Assemblée Nationale)라고 불린다. 다른 유럽국가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체제이다. 상원의 경우 그냥 ‘상원’ (Sénat)이라고 하지만 하원은 ‘국민의회’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명칭은 국민이 직접 선출한 의원들로 이루어지고 국민을 대표하는 하원이 프랑스에서 차지하는 비중,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실제로 헌법에 따라 상원과 하원은 동등한 입법권을 행사하지만 법안 통과에 대해 상원과 하원간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최종 결정권을 하원에 넘기도록 되어있다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 구성되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에는 귀족, 성직자, 평민 각 신분의 대표자가 모여 의회 역할을 하는 삼부회(États généraux)가 존재했다. 삼부회에서는 신분에 따른 표결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 3신분(le Tiers état)인 평민과 부르주아 계층의 입장을 대표하는 것이 어려웠다. 18세기 말, 재정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통해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타협점을 찾지 못해 도리어 삼부회를 폐쇄하는데 이르렀다. 절대왕정의 체제와 기존 삼부회의 표결방식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제 3신분 대표자들은 1789년 6월 17일, ‘제3신분이 적어도 국가 전체적으로 100분의 96을 차지한다’라고 주장하며 국민의회를 선포하였으며, 6월 20일 테니스 코트의 서약(Serment du Jeu de Paume)을 통해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기까지 의회를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서하였다. 이어서 제1신분과 제2신분 중 일부가 국민의회에 참여하게 되자 루이 16세는 국민의회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공포정치(la Terreur)시기부터 왕정복고(la Restauration) 그리고 지금의 제 5공화국(5ème République)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국민의회’는 국민공회(Convention nationale), 입법원(Corps législatif)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며 역할과 비중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오늘날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국민들이 선출한 총 577명의 의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의 임기기간은 5년이다. 국민의회는 프랑스 국민들을 대표하고, 상원과 같이 입법권을 행사하며, 서면 또는 구두 질문구건을 통해 정부활동을 통제한다. 매년 국민의회에서는 100여 개의 법이 제정되고 1,400시간이 넘는 토론이 이루어지며 다양한 분야의 상임의원회에서 450개 가량의 보고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또한 프랑스는 2008년 7월 헌법개정을 통해 사후적 위헌법률심사제(QPC)를 도입하고 헌법재판소의 역할을 강화함으로써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더욱 보장하였는데, 이와 동시에 국민의회가 갖는 역할 역시 더욱 중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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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국회의사당은 파리 7구의 부르봉 궁전(le Palais Bourbon) 내부에 위치한다. 국회의사당은 콩코르드 광장(Place de la Concorde)과 오벨리스크(Obélisque)를 사이에 두고 마들렌느(Madeleine)성당과 마주한다. 1722년부터 지어진 부르봉 궁전은 루이 14세의 딸인 부르봉 여공작과 그녀의 정부의 거처로 쓰였다. 당시 부르봉 궁전은 베르사유의 그랑 트리아농(le Grand Trianon)과 흡사한 모습(당시에는 전면의 12개 기둥이 없었음)으로 화려한 외관을 자랑했다고 한다. 부르봉 여공작이 죽고 부르봉 궁전을 소유하게 된 루이 15세는 꽁데 공에게 궁전을 양도했는데 그는 앞뜰을 넓히고 마구간을 비롯해 추가적인 건물들을 지으며 부르봉 궁전을 확장하였다. 1765년에 시작된 대공사는 1788년에 끝이 났지만 1년 후 꽁데 공은 완성된 궁전을 버리고 대혁명을 피해 도망쳐야 했다. 대혁명과 공포정치 이후 총재정부(Directoire)가 들어서며 부르봉 궁전은 500인회(Conseil des Cinq cents)와 원로회의(Conseil des anciens)로 이루어진 의회(Corps législatif)의 회의장으로 쓰였다. 총재정부 이후에도 부르봉 궁전은 다양한 형태의 의회를 수용하였다. 오늘날 국회의사당 건물의 모습은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 후 완성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1세는 혁명 기간 동안 부서진 건물을 재건하라고 명했다. 건축가 베르나르 뽀예(Bernard Poyet)는 30개의 계단 위로 삼각지붕모양의 상단을 받치는 12개의 기둥(그리스 신전 또는 교회의 주랑과 같은)을 세웠다. 재건 공사의 목표는 우아하면서도 종교적인 외관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폴레옹은 부르봉 궁전의 새로운 외관을 보고 맘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더 이상 포병 장교가 아니기 때문에 저 보기 싫은 교회(또는 신전) 현관에 대포를 쏘라고 명령을 할 수 없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며 부르봉 궁전 내부는 현대적 모습 (전자기기, 회의장, 주차장 등)을 갖추게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 국회의사당은 부르봉 궁전 이외에도 부속건물들을 사용하여 3,000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 면적은 124,000m2에 달한다.

(출처: 프랑스 하원 공식 홈페이지 www.assemblee-nationale.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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